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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wigen

wigen

넌 왜 에로게하면서 페미질이세요

August 1, 2016

“넌 왜 에로게하면서 페미질이세요”

축하합니다. 성인향 게임, 속칭 ‘에로게’가 여성 혐오 컨텐츠라는 것을 인지하신 것만 해도 크나큰 발전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복잡한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모에(萌) 문화는 항상 오타쿠 주변의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여 그것을 착취해온 꽤나 무시무시한 컨텐츠였습니다. 초창기 올드스쿨 오타쿠 예술가들은 작품의 표현 범위를 넓히기 위해 자신의 가부장적인 로리타 콤플렉스를 플라토닉 러브로 포장해왔습니다. 일종의 ‘투명 망토’와 같은 장치였달까요? 하지만,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오타쿠와 컨텐츠 제작자들은 자신의 납작한 취향을 그대로 작품에 반영하고 그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포장지로 모에 코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에’의 어두운 면입니다.

쿠마미코라는 작품을 볼 때 어떤 부분에 주목하시나요? 저는 마치라는 캐릭터에 내재된 귀여움 만큼이나 주변 캐릭터나 상황 설정이 마치라는 캐릭터의 귀여운 모습을 보이는 장치로써 작용하는 부분을 좋아합니다. 마치라는 모르모트를 두고 이런저런 자극을 주면서 반응을 즐기는 애니메이션. 문장만 놓고 보아도 벌써 이렇게 착취적인 컨텐츠가 어디에 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화에 대한 논란을 살펴보자면, 이런 구도를 파악하지 못한 오타쿠들이 마치에 대한 요시노의 태도를 그 작품을 만든 크리에이터의 인성의 영역으로 끌고 와 논하는 모습이 퍽 우습게 보이기도 합니다. 벌써 애니메이션이 이러니, 태생이 포르노였던 에로게의 영역은 더 심각합니다. 당장 업계인들이 자주 말하는, ‘그림 이쁘게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와 매력있는 목소리를 내는 성우를 쓰면 일단 하고 싶은 작품이 된다’는 것. 일반적인 포르노로써 생각했을 때 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처음 화제로 돌아와보죠. 질문의 요는 우리가 즐기는 이러한 컨텐츠들이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여성의 인권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라는 부분입니다. 애니메이션과 성인향 게임 컨텐츠가 성차별적이고 유해하므로 그것을 열람하거나 향유하는 일을 전부 금지해야 하나요?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걸 우린 모두 압니다. 항상 우리가 말해왔듯 에로게는 가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가상은 가상, 현실은 현실이니까요. 그리하여 오타쿠들은 자신을 둘러싼 모에 컬처를 소비하기에 앞서, 그 두 영역을 정확히 구별하고, 나아가 그에 대해 올바른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빻음’이 현실에 번져나가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영역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논란은 명백한 차별의 대상으로 놓인 ‘여성’이라는 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집단의 선에서 끌어올리며 발생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에 대해 이야기 할 땐, 행동하고 바뀌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두 가지 진영만이 구성될 뿐입니다. 과거의 제가 그랬듯, 제 주변에도 그에 대해 ‘뭐라는 건지 알긴 알겠는데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다고 해도,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성혐오와 차별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회의 다양한 문제,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소수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자신의 위치를 지정하는 것은 오타쿠라는 정체성에 관계 없이, 문명인이라면 누구나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타쿠들은 하필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빻은’ 구간을 독차지한 채, 그 안에서 발생하는 네거티브한 요소를 씹어먹고 자란 사람들입니다. (‘내 신부가 모니터에서 튀어나왔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말, 다들 한 번쯤은 해본 경험이 있지 않나요?) 오래 전의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이렇게 잠재적 가해자, 또는 그 잠재적 가해자의 등을 떠미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은 오타쿠가 오타쿠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주류 안에 섞이기 힘들어하는 이들이 오타쿠적인 취미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동시에 범죄나 사건에 관련되기도 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서문” ([오쓰카 에이지: 순문학의 죽음·오타쿠·스토리텔링을 말하다])

오타쿠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에 대해, 이러한 변호의 언급을 남긴 바 있습니다. 과거의 오타쿠들은 오타쿠이기에 앞서, 전체 사회의 구성원을 분류했을 때 지금에 비해 ‘언더그라운드’의 영역에 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오타쿠란 단어가 추상적으로나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고, 또 많은 전대의 오타쿠들은 각종 컨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자리를 꿰차 자신의 ‘덕력’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오타쿠와 모에 문화는 언더그라운드에 위치한 것도, 마이너 컬처도 아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영역을 벗어나 주류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그에 따라 요구되는 윤리적 책임 역시 함께 받아내어야 합니다.

에로게의 경우는 어떨까요? 에로게는 페티시의 집약체입니다. 남성이 성적으로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 캐릭터를 그려낸 컨텐츠입니다. 그에 따라, 그것을 포르노로서 즐기는 일엔 문제가 없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조건이 성립하려면 에로게이머에겐 그것을 향유하는 가운데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여성에 대한 인식이 현실에 침범하지 않도록 정확히 선을 긋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에로게이머이고, 그저 여성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는 정도로 행동의 책임은 면제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에 대해 발언하기를 결심했다면, 그것이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달래기 위한 활동이 되도록 두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문명인으로써 부끄럽지 않기 위한, 오타쿠로서의 부끄러움에 기인한 영원한 발악의 시작에 가깝습니다.

발언의 방향에 관한 이야기도 자주 들려옵니다. ‘네가 그렇게 잘 알면 혼자 다 알아서 실천하면 될 것이지, 왜 남한테 뭐라 그러는거야?’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입니다. 그야 본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니까요. 저만해도 항상 트위터로 에로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상인데, 최소한 그걸 상쇄할만한 똑같은 아웃풋을 주려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열심히 떠들어야지 별다른 수가 있겠습니까? 에로게에 대해선 쉽게 이야기하면서, 그 에로게의 여성 혐오에 대해선 발언하지 않는다면 저는 누구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게 될까요?

딱 그만큼이나 메갈리아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들려옵니다. 흔히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찾아나서는 기나긴 여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역시 위의 이야기와 크게 맥이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메갈리아의 모든 활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제 위치는 인식이 바뀌여야 하는 남성(그것도 여성 혐오 컨텐츠 너무 좋아하는 ‘애니프사’)의 선에 있고, 고작 그런 주제에 제겐 메갈리아가 대의로 깔고 가는 페미니즘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어떠한 당위도, 자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메갈리아가 바라보고 있는, 남성의 헤게모니가 실존하는 이상(그리고 이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드러낸게 메갈리아 최고의 업적이라 생각하는) 저는 그에 대한 피드백을 넘어 저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소리를 흐리는 방향으로써의 참견을 할 입장이 아닙니다. 메갈리아를 너무나 두려워하는 분들 덕택에 ‘페미니즘 지지 ≒ 메갈리아 지지’가 되어버린 시점에 메갈리아의 다소 난폭한 행동만을 콕 찝어 비난하는 것은 단기적 관점에선 타당하지만 더 멀리 볼 때 어느 진영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게 될까요? 그로 인한 결과는 과연 제 위치를 어떻게 정의하게 될 것이며, 지금까지의 제 행동에 대해 어떤 맥락을 만들게 될까요?

최근의 이슈에 대한 입장은 대충 이렇습니다. 모에의 페티시적 소비가 영원히 가상의 선 안에서 비판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방어책인,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 나오는 포르노를 소비하는 것이므로 이 컨텐츠는 현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페티시일 수 있다.’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도 이런 현실과 마주한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아무런 책임 없는 소비를 되풀이하는 이들이, ‘모에 컨텐츠는 유해하다’라는 공격에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요? 저는 최소한 그에 대해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하고 표현의 자유라는 공허한 외침만을 반복하다 사례와 판례로 굉침당하느니,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봐두는 편이 낫겠다고 믿을 뿐입니다.